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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공학박사 김태철의 문화기행:국토교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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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공학박사 김태철의 문화기행

조선창업을 향한 출발점…황산대첩에서 미래를 꿈꾸다 ③

국토교통뉴스 | 기사입력 2024/03/04 [03:10]

[탐방] 공학박사 김태철의 문화기행

조선창업을 향한 출발점…황산대첩에서 미래를 꿈꾸다 ③

국토교통뉴스 | 입력 : 2024/03/04 [03:10]

▲ 김태철 공학박사     ©국토교통뉴스

오늘 마지막 일정은 이성계가 고려말의 변방에서 중심인물이 되게 만들었던 황산대첩을 보고자 했다. 그래서 첫번째로 찾았던 장소는 운봉면에서 인월면으로 행해 흐르는 남천의 피바위였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다. 금강하구로 배 5백척을 타고 온 왜적들은 고려말 남쪽 지역을 유린했다.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배극렴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특별히 왜적들이 운봉을 침략한 이유는 뭘까? 운봉의 지리적 위치는 남원시에서 20㎞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동쪽에는 산악지대인 산내면, 남쪽은 주천면, 북쪽은 산동면, 서쪽에는 이백면을 경계로 남원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운봉은 해발 470m가 넘는 지리산 첩첩산중에 자리한 고원분지다. 하지만 비옥한 넓은 땅에 연중 메마르지 않는 지리산 맑은 물과 산나물이 많아 사람 살기 좋은 조선 십승지 중의 한 고을이었다. 

 

왜적들은 비옥한 운봉에서 생산되는 식량 보급기지를 바탕으로 곡창지대인 호남을 통해 개성까지 진격할 계획을 세운다. 왜적들은 출병할 때 반드시 챙기는 세 가지는 칼과 국그릇, 그리고 말발굽 편자용 쇠가락이었다. 지리산 운봉은 철의 생산지였다. 가야 때부터 양질의 철을 생산했던 운봉현 관할인 운봉, 인월, 아영, 산내 4개 지역에 총 10여 개가 넘는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칼과 편자, 개인용 국그릇과 양질의 쌀을 생산하는 운봉은 왜적들이 선택한 최적지였던 것이다.

 

황산전투는 야간전투가 승패를 가름해줬다. 왜적들에 대한 활 공격은 목표가 잘 보여 뚜렷해야 하는데 밤중의 조명은 오직 달 뿐이었다. 마침 보름날 전후이기는 하나 변덕스럽기로 소문난 황산바람이었다. 결전의 날 황산 주변은 구름으로 덮였고 야간전투에서 조명역할을 할 달빛은 구름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야간전투 전략을 강행했고 왜적들은 고려군의 전술 전략을 모른 채 달빛 없는 전투에서 승전을 장담했다. 출처 : 여수넷통뉴스(http://www.netongs.com)

 

칠흑 같은 밤에 적군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달이 뜨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마침내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고 한다. '달을 끌어올렸다'는 뜻의 인월이다. 용비어천가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화살로 젊은 왜적장 아지발도 이마 부위를 맞혀 투구를 벗기자, 그의 사랑하는 부하 이지란이 화살을 날려 사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군은 기세를 타고 왜적들을 몰아붙여 피바위 부근에서 몰살시켰다. 

 

필자는 어린시절 운봉하면 생각나는 것은 남원에서 운봉연재(여원치)를 통해 검은 매연을 품어내면서 힘겹게 버스는 470m 운봉고원을 올랐다. 고원인지라 모내기도 추수도 무척 빨랐었다. 그리고 람천을 따라 달리는 버스는 인월시장에 도착한다. 한참 후 버스는 또 람천을 따라 함께 우회전을 하면서 산내면으로 향했다. 이러한 정겨운 노선은 지리산 성삼재에서 시작되어 바래봉에서 끝나는 또 하나의 지리산 능선(성삼재–만복대-정령치-세걸산-팔랑치-바래봉) 이 있기 때문이었다. 

 

▲ 지리산 뱀사골 계곡  © 국토교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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